
의열단원 단장

김원봉(金元鳳) 1898~1958
1898년 | 경남 밀양(密陽)에서 출생하였다. 호는 약산(若山)이다. |
1918년 | 난징의 진링대학에 입학하였다. |
1919년 | 1919년 12월 윤세주·이성우·곽경·강세우 등과 의열단을 조직하고 의백(단장)에 피선되었다. 그들은 본거지를 만주와 상해·난징 등지로 전전하면서 국내의 경찰서 폭파, 요인 암살 등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지속하였다. |
1926년 | 황포군관학교 훈련생으로 입소하여 투쟁노선을 변경하였다. |
1927년 | 중국 국민당의 북벌에 합류하였다. |
1929년 | 상해에서 정치학교를 개설하였다. |
1932년 | 난징에서 조선인혁명간부학교를 창설하는데 중국 국민당계의 도움을 받았다. 11월에는 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여 혁명세력의 결집을 꾀하였다. |
1935년 | 신한독립당·한국독립당·대한독립당·조선혁명당·의열단의 5개 단체를 규합하여 한국민족혁명당(1937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칭)을 조직하였다. |
1937년 | 1937년 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우한으로 가서 조선민족혁명당이 중심이 되어 전위동맹·혁명자연맹·민족해방연맹 등 단체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여 대일선전전에 주력하였다. |
1938년 |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동의를 얻어 조선의용대를 편성하고 대장에 취임하였다. 장개석의 주선으로 김구와 함께 각 혁명단체가 공동 정강하에 단일조직을 만들 것을 제의하는 「동지동포에게 보내는 공개서간」을 5월 발표하였다. |
1944년 |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에 취임하고,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 등을 역임하였다. |
1945년 | 12월 임시정부 귀국시에는 군무부장의 자격으로 귀국하였다. 귀국 전에 발표된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군사부장으로 명단에 올랐으며, 귀국 후 계속 환국한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좌우합작을 추진하였다. |
1946년 | 6월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을 인민공화당으로 개칭하고 지속적으로 연합전선구축에 노력하였으나, 여운형이 암살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본격화되자 월북하였다. |
1948년 |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(세칭 남북협상)에 참가하였다.그 뒤 북한에서 국가검열상·내각 노동상·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하였다. |
1958년 | 11월 사상검열로 숙청당하였다. |








의열단원 주요 단원 (사진을 클릭하면 주요 업적을 볼 수 있습니다.)
김성숙
신채호
황상규
김대지
류자명
윤세주
이성우
곽재기
강세우
이종암
한봉근
한봉인
김상윤
신철휴
배중세
권 준
박재혁
최수봉
김익상
김상옥
김지섭
나석주

의열단원 일반 단원 (사진을 클릭하면 주요 업적을 볼 수 있습니다.)
강인수
고인덕
구여순
김기득
김병환
김 산
김시현
김 한
남정각
문시환
박문호
박문희
박 열
박자혜
박차정
배치문
오성륜
유석현
윤치형
이병철
이원대
이육사
이진영
이회영
장건상
정율성
최용덕
현계옥
※의열단원의 자료를 발굴 중이며,
추가로 업데이트될 예정입니다.